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지레 클라리 (문단 편집) === 스웨덴의 왕자비와 왕세자비 === [[파일:portratt-drottning-desideria-desiree-malning-1811-francois-gerard-kungliga-slottet.jpg]] 1811년 데지레 [[1810년]]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이 사망했다. 당시 스웨덴 왕실에서는 [[쿠테타]]로 인해 [[스웨덴 국왕|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칼 13세]]로 옹립되었으나, 후계자가 없어서 [[덴마크]] 왕실과 가까운 친척인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을 왕위계승자로 세웠다.[*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을 후계자로 세운 이유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합병시키는데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마저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스웨덴 왕실에서는 다음 후계자로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아들 구스타프를 원했지만 스웨덴의 귀족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귀족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같은 강력한 국왕을 원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에게 눈을 돌려 자신들에게 가장 친숙한 인물인 데지레의 남편 [[칼 14세 요한|장 베르나도트]]를 후계자로 점찍었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과 전쟁을 했지만 포로로 붙잡힌 스웨덴의 장교들에게 매우 잘 대해줬고, 베르나도트가 현재 독일 북부 지역 [[한자 동맹]]지역의 총독으로서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들의 재기에 기여했다는 것도 한몫 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스웨덴과 자주 교역을 하는 곳이기에 베르나도트에 대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스웨덴에서 투표를 통해 남편 장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남편의 상황으로 인해 데지레는 [[프랑스]]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남편 [[칼 14세 요한|장]]이 먼저 스웨덴으로 떠난 뒤 12월 데지레도 아들 [[오스카르 1세|오스칼]]과 '늑대의 땅' 스웨덴으로 향했다. 먼저 헬싱보리에 도착한 후 할름스타드와 예테보리를 거쳐 육로로 이동했다. 데지레의 일행 중 한 사람은 '굴뚝의 연기 외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일기에 썼다. 그리고 1811년 1월 6일 저녁 영하 24도의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여행의 여파로 고열과 감기를 앓았다. 이후 스웨덴에서 데시데리아로 불리게 된 데지레는 스웨덴에서 매우 불행했다. 일단 [[프랑스]] 남부 지역 출신의 데시데리아에게 추운 [[스웨덴]]의 겨울철은 매우 낯선 환경이었고, 스웨덴 궁정에서도 데시데리아를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스웨덴의 왕비이자 양시어머니였던 샤를로테 왕비는 데시데리아를 두고 매우 선량한 사람이라고 언급했지만, 그녀가 프랑스인이고 자신의 새 조국을 거들떠 보지 않으며 아들을 품안에 싸고 돈다는 등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다. 게다가 프랑스인인 그녀는 당시 교양어였던 [[프랑스어]]로 대화가 가능했지만 [[스웨덴어]]는 잘 몰랐기 때문에 궁정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데시데리아를 안타깝게 본 [[구스타브 3세]]의 왕비였던 [[소피 마그달레네|소피아 막달레나]]는 그녀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왕실 업무로 매우 바빴고 아들도 후계자 교육을 위해 떨어져 지냈다. 덤으로 당시 스톡홀름 궁은 보수가 안 되어 낡고 바람이 잘 통해 추웠다. 이런 불화와 추운 날씨로 인해 데시데리아는 봄이 되자 파리로 돌아가고자 했다. 남편과의 긴 논쟁 끝에 결국 1811년 6월 스톡홀름을 떠났다. 공식적인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아 프랑스 쁠롱비에흐의 욕탕에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을에 스톡홀름으로 돌아오기로 했지만 장장 12년간 파리에 머물게 된다. 파리에서는 스웨덴에 대해 '''''매우 추웠다.'''''라고 이야기 했다. 데시데리아는 고틀란드 백작부인으로서 전처럼 파리에서 언니 줄리 클라리와 같이 지내며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데, 스웨덴의 왕세자비 살롱을 열어 데시데리아의 많은 친구들이 그녀의 살롱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스웨덴의 왕세자비여서 스웨덴인들도 데시데리아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다.[* 특히 스웨덴 대사가 데시데리아의 살롱에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쟁이 심각해지면서 데시데리아의 살롱에는 반 나폴레옹파의 사람들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데시데리아는 주변 친척들과 함께 여러 지역으로 오고 다녔다. 당시 유럽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프랑스의 적국이었고 그 중 스웨덴도 포함되어, 남편 칼 요한은 스웨덴을 위해 프랑스를 버리고 전쟁을 해야 했다. 프랑스와 싸우게 된 칼 요한은 데지레를 스톡홀름으로 데려오려 노력했지만 데지레는 파리에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친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던 데시데리아는 프랑스에서 친구들과 친척들을 돕는데 열중했다.[* 언니 줄리의 경우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정이 복고되면서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게 되자, 데시데리아가 언니를 '''''스웨덴 왕세자비의 손님'''''으로 프랑스에 초대해 언니를 보호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